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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죽걸어보기

갑<>을(갑)<>병(을/갑)<>정(을)

우리나라 계약서를 보면 상호 관계를 '갑(甲)'과 '을(乙)'로 칭한다.
사실 이 '갑'과 '을'은 어떤 지위적인 '표식'보다는 '지칭'의 의미로 시작되었으리라.

헌데 우리나라 계약 관계에 있어서 '갑','을'은 종속적 지위적 의미로 사용되고 당연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 듯 하다.

예전에 나의 멘토와 술 자리에서 이 '갑' '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고 합당하게 돈을 받는 것인데 왜 굽신거려야 하고, 주종처럼 되는 것일까요? 나는 반드시 당당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겁니다"

라고 얘기했었던 것 같다.

물론 멘토는 나에게 무언가 얘기해줬겠지만, 그 당시 나의 '갑'에 대한 불만으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2년전쯤 모 사업 진행으로 인해, 대형업체 담당자들을 호출(?) 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규모상 상당히 작은 우리 회사차원에서 그들을 오라가라 했던 것 부터가 그들은 기분 나빴을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어쨋든 칼자루(?)를 우리가 쥐고 있었다는 판단에서 '그 분들'을 불렀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억으로 그들은 여전히 '갑'이었던 것 같았다.

미팅을 오면서 회사차원의 등산가는 날이라 등산복 차림으로 왔다면서 명함도 주지 않았던 모과장님.

그러나 이내 우리의 사업 계획을 듣고는 의자 깊숙히 박았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아 자세를 고쳐잡으며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며 돌아갔던 모과장님.

추후 팀장(기업 팀장이면 부장급)님이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며 자기네 회사로 와달라고 했었으나, 내가 안갔었던 것 같다.

다른 대형업체 담당자는 아예 오지도 않았었다.

 

이후 계획했던 사업이 일시에 보험사와 증권사를 강타하는 회오리처럼 불어왔고, 많은 업체들이 전화를 해왔었다.

 

자아,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촛점은 그게 아니다.

이후 계약을 진행함에 있어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발주사는 뭐 당연 '갑'이실테고...늘 그래왔으니 일단 접고 들어가자...

문제는 대형SI인데...자기네 계열사 사업이니 자기네가 '갑'을 해야 한단다.

그럼 그림은 우리가 그리고 자기네들은 숟가락만 얹히겠다는 심보인데...

당연 거절했다. 결국 발주사 팀장님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바람에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갑'과 '을' 그리고 '병' 계약 체결을 하고 말았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갑(실은 병)질'은 실로 대단했다.

SI인생 16년 동안 지내면서 당연시 되었던 일이지만, 그래도 그림은 우리가 그렸는데 아는 척은 이루 말 할 수 없으며, 중간에서 자금 회전도 더디게 진행해주었다.

 

그 후, 그 사업이 끝난 후 '그 분'들이 있는 또 다른 계열사에서 비슷한 사업을 진행하였고, 우리는 발주사와 다이렉트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그 분'들의 우리의 '을님'이 되셨다.

기술 이전 관련 문제로 실질적인 작업은 불가하나 추후 운영을 위해서 필요했던 조치였던 것이다.

거기서도 '을'은 '갑질'못지 않은 포스를 풍겨주셨다.

 

우리나라의 주종관계 개념은 아마도 신분제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풍습의 영향과 급속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 업체를 키우기 위한 '눈감아주기식' 정책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돈을 주는 쪽은 언제나 어깨를 들썩이며 거드름을 피우고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쪽은 어깨를 굽히고 굽신거리는...(결국 돈은 돈대로 못 받고 몸은 몸대로 상한 채 쫒겨나기 일쑤)

오늘날 현대에까지도 '정당한'(?) 계약을 통해 이뤄진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돈을 주는 쪽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을'이 '갑'이 될 때, 그들은 '을'이었을 때 받았던 서러움을 분풀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갑질'을 해대곤 한다.

'을'은 또 다른 '병'에게, '병'은 또 다른 '정'에게...

물고 물리는 '갑', '을', '병', '정' 신분은 고쳐질 수 없는 한국 경제 사회의 또 하나의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을'을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하에 많은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영원한 '갑님'들은 콧방귀도 안뀐다.

 

 

영국에서 일을 할 때,

계약서 작성을 런던 모처의 한 커피숍에서 진행했었다(3만£. 당시 환율로 약 6천여만원). 다른 스케줄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닌 상호간의 업무 진행에 따른 결과만이 그들은 중요했었던 것이다.

계약서 내용에 '갑', '을'은 없었다. 'relationship'과 'partnership'으로 표현됐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힘을 실어주는 내용이 아닌 상호간에 이익과 손해에 대해 동급으로 계약 내용은 작성되었었다.

정당하게 요구할테니, 요구한 만큼 해달라.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정당하게 요구하고, 당연하게 지불하는...

 

그런 '갑', '을' 관계가 우리 사회 그리고 IT업계에도 일어나길 바라본다.